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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에서 '개죽음', 몇 명인지 아십니까
  

군대에서 '개죽음', 몇 명인지 아십니까        
2013년 2월 어느 날이었다. 페이스북 메시지에 생각지도 못한 글이 떴다. 당시 민주통합당 소속의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된 김광진 의원의 제안이었다.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에 속해 있던 그 분이 보내온 페북 메시지의 요지는 이랬다. 

"초면에 결례일지 몰라 메시지부터 보냅니다. 저는 현재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일하고 있는데, 여기에 있는 동안 제가 꼭 이루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바로 군인의 인권 문제입니다. 특히 '의무복무 중 의문사한 군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생각하신 계획을 제가 가진 국회의원 권한을 통해 함께 하시면 어떨까요?" 

뜻밖의 제안이었다. 고백하자면, 사실 당황했다. 국회의원이 이런 제안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사실 국회의원과 보좌진의 관계는 평등할 수 없다. 국회 보좌진 사이에서 떠도는 농담이 있다. '사'노비 신분에 대한 비애다. 

'공'노비인 일반 공무원과 달리 국회의원의 말 한마디에 임용과 면직이 결정되니, 거기서 나온 자조적 표현이다. 그런 관계에서 이처럼 정중하게 '함께 하자는 제안은'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고마운 제안에 내 답변은 지금 돌아보면 조금 의외였다. "제안은 고맙지만 일주일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말로 답변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김광진 의원 제안, 거절할 수 없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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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열하는 어머니. 어려서부터 수재였던 이 어머니의 아들은 여전히 순직처리 되지 못하고 있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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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남들 보기에 이런 고민은 배부른 고민이었을지 모른다. 제안을 받을 당시 나는 '백수'였다. 2012년 11월, 대통령 선거를 앞 둔 그때, 나는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대통령을 할 수 있지만 박근혜만은 안 된다'라는 글을 쓰고자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공무원 직위에서 사표를 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일자리를 주겠다고 국회의원이 먼저 연락을 줬다면 당장 고맙다며 달려갈 일이지 무슨 고민이 필요할까. 여하간 그러다가 결국 김광진 의원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첫 출근을 하던 2013년 3월 4일 아침, 나는 첫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에게 현관문 앞에서 또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루를 나가고 그만둘지, 아니면 한 달을 다니다 그만둘지, 그도 아니면 반나절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올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출근합니다. 만약에 중간에 그냥 집에 돌아 왔다 해도 야단은 치지 마세요."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아내는 내가 의원실로 출근하는 것에 반대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을 실현할 수 없고, 그냥 일개 보좌진의 역할만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냥 글 쓰고, 자유롭게 생각하면서 당신이 원하는 인권운동을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아내의 주된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출근을 결심했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김광진 국회의원에게 제안을 받기 전 날, 내가 쓴 페이스북 글이 내내 머리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이 날 나는 격정에 찬 심정으로 장문의 글을 써서 페북에 올렸다. "대한민국에 300명의 국회의원이 있는데, 왜 군에서 자식 잃은 국민에게 응답하는 국회의원은 없느냐"는 외침이었다. 

한 해 평균 130여 명의 군인이 사망하는 나라. 그리고 그중 2/3의 사망자가 '자살로 처리되는' 대한민국 군대에서 언제까지 그 억울함을 주장하는 유족들을 외면할 것인지 따져 물었다. 

누구처럼 회피하지 않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고 귀하게 키운 아들을 입대시켰는데 "그 아들을 '이유도,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잃었는데 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느냐"며 유족을 대신하여 따졌다. 그래서 "누구라도 제발, 이들 군 사망사고 유족의 고통에 화답해 달라"며 글을 맺는 장문의 글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군 의문사 문제에 대한 해결을 위해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김광진 의원이 해 왔으니 어찌 이를 거부할 수 있을까. "왜 화답하는 이가 없느냐"고 말해놓고 정작 "그럼 같이 하자"고 하는데 이제 와서 싫다고 하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일 아니겠는가. 

그것이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또 당시만 해도 김광진 의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도, 그리고 반나절 만에 집에 돌아올지라도 일단은 나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출근을 결심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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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3월, 국방부장관 청문회를 앞둔 김병관 후보자가 군에서 자살로 처리된 이들을 상대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사퇴 촉구 기자회견.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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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출근했던 나는 이후 2년 1개월 동안 김광진 의원과 함께 군 인권 개선과 관련한 여러 일을 했다. 물론 아직도 가야할 길은 구불구불 하지만 군 의문사를 비롯한 인권 문제에 있어서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나는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김광진 의원과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난 2년 1개월간 있었던 이 일에 대한 성과와 한계, 그리고 우리가 해결해야할 군 사망사고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관련한 이야기를 기사로 쓰기로 생각했다. 7개의 꼭지로 나눠 그동안 김광진 의원실에서 군 사망사고 유족과 함께 해 온 발자취를 많은 분들에게 전하려 한다. 이것이 앞으로 들어설 제20대 대한민국 국회가 이어가야 할 중요한 인권 과제이기 때문이다.

첫 단추는 19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인권운동을 하면서 종종 언론과 인터뷰를 한다. 그럴 때면 기자들이 늘 빼놓지 않고 던지는 질문이 있다. "어떤 계기로 군 의문사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느냐"는 것. 그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하나가 있다. 바로 1998년, 판문점에서 의문사한 한 육사 장교의 이름이다. 

1998년 5월 15일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천주교 인권위원회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하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로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육군 중위로 복무하던 중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사망했으나 군 당국이 '자살'로 일방 처리하여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들어보니 정말 의아했다. 나는 의문을 제기하는 그 아버지의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의문을 밝히고자 노력했다. 그때 내가 만난 아버지가 1998년 2월 24일 판문점에서 의문사한 고 김훈 중위 아버지 '김척 예비역 육군 중장'이었다. 

그리고 이후 김훈 중위 사건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면서 천주교 인권위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쭈글쭈글한 주름 가득한 80대 할머니부터 50대 초반의 아주머니까지. 또 절망과 우울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내 아들의 억울한 죽음을 내가 어찌할 수 없다"며 눈물짓는 아버지까지 연일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랬다. 의무복무를 위해 군에 입대한 아들을 잃었으나 그 억울함을 누구에게도 호소하지 못한 채 마음의 병을 앓고 살아왔던 군 사망사고 유족들이었다.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나, 그 죽음이 사람의 죽음이 아닌 '개죽음'이라는 참혹한 단어로 불리던 피해자들. 그렇게 해서 지난 18년 전인 1998년, 나는 대한민국에 이처럼 많은 군 의문사 피해 유족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후 나는 이러한 군 의문사 피해 유족의 염원인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관련법률 제정을 위해 싸웠다. 글로 쓰고, 방송에서 말하고, 또 거리에서 유족과 함께 국방부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하지만 권한이 없는 싸움은 한계가 있었다. 세상이 변하면서 조금씩 변했지만, 여전히 '자살로 처리된' 군인을 왜 국가가 책임져야 하냐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주장이다. 국방부가 자살로 사인을 규명하는 방식은 대단히 잘못된 일이었다. 국방부 헌병대는 과거 군인이 사망할 경우 '누가 방아쇠를 당겼고, 누가 목에 줄을 매었느냐'를 기준으로 사망 원인을 결론 내렸다. 예를 들어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고, 자기가 스스로 목에 줄을 매면 자살로 결론내리는 방식이 군 헌병대 수사다.

하지만 유족은, 아니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이 억울한 일을 '똑같이 당해보면' 이러한 판단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금방 알게 된다. 간단하다. 헌병대는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으나 자살이 맞다고 결론내리지만 유족은 다르다. 실제로 사망한 군인이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다 해도, '그렇게 방아쇠를 당길 수 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가 밝혀져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된 수사다. 

지난 2014년 고참들에게 맞아죽은 윤 일병이 견디다, 견디다 참을 수 없어 맞아 죽기 전날, 스스로 목을 매었다면 군 헌병대 수사 방식에서는 응당 자살로 처리된다. 이런 방식의 군 헌병대 수사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러니 누가 원통해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처럼 잘못된 군 헌병대 수사 방식을 바꾸고 그 피해자들의 명예를 국가가 책임지고 회복시켜달라는 캠페인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있었다. 여러 개로 흩어져 있던 군 사망사고 피해자 유족 단체를 하나로 묶는 일이었다. 확인해 보니 2013년 당시 이런 단체가 다섯 개로 흩어져 제각각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절대 국방부를 이길 수 없다. 이 끔찍한 비극을 당하기 전까지 그저 평범한 사람 중 한명이었던 이 분들이 갑자기 어떻게 싸울까. 그저 억울하니까 유족 단체에 가입하여 싸우는 것뿐인데 그렇게 작은 역량조차도 모래알처럼 흩어졌으니 제대로 싸운다면 그것이 더 신기한 일이었다.

특히 국방부 입장에서는 이처럼 분열된 유족 단체가 내심 고마웠을 것이다. 대표성이 없으니 더욱 그랬다. 예를 들어 다섯 개 단체 중 한 곳이 결의를 하고 국방부 앞에서 장관 면담을 요구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고 치자. 그럴 때 국방부 입장은 편하다. "단체가 다섯 개나 있는데 어느 한 단체의 요구만으로 장관 면담을 받아들이기 곤란하다"며 거부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제일 먼저 다섯 개로 흩어진 군 사망사고 유족 단체를 하나로 묶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유족 분들에게 일일이 연락하여 가지고 있는 유족들의 연락처를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방식으로 한 분, 한 분의 유족 전화번호와 주소를 얻었다. 그리고 이렇게 얻은 전화와 주소로 문자 메시지와 우편물을 보냈다. 군 사망사고 희생자를 위한 명예회복 싸움을 '함께 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해서 2013년 5월 24일,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국회의원이 주최하는 군 의문사 피해 유족의 명예회복 촉구 행사가 국회에서 개최되었다. '나는 군대에 아들을 보낸 죄인입니다'라는 이름으로 열린 이날 행사는 김광진 국회의원 주관했으며 유승민, 진성준 등 여야 국회의원이 주최자로 참여했다.

이날 행사에서 유족들은 그동안 혼자만 간직하던 자신의 아들과 남편, 그리고 남동생의 영정을 들고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로 모여 들었다. 그리고 국회를 찾을 때마다 '귀찮은 악성 민원인'처럼 핍박만 받아오던 군 사망사고 유족들이 그동안의 한과 눈물을 쏟아내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당당히 촉구했다. 그렇게 해서 흩어진 유족을 하나로 묶어 낼 수 있었다.

예우없이 죽어간 군인, 얼마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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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5월 24일 개최된 대한민국 국회 최초의 '국회의원 주최' 군 사망사고 명예 회복 관련 행사 당시 만든 자료집. <저는 군대에 아들을 보낸 죄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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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 번째로 나선 일은 '군 사망사고 피해자의 정확한 현황 파악'이었다. 이를 위해 나는 1948년 군 창설 이래 지금까지 사망한 군인 중 국가로부터 어떤 예우 없이 처리된 군 사망사고 피해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그 통계를 제출하도록 국방부에 요구했다.

그런데 요구서를 보낸 다음날, 국방부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전화가 왔다. "요구한 자료를 보내 드릴 수 없다"는 담당자의 답변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 이유를 물으니 그 답이 더욱 기가 막혔다. "지금까지 군에서 자살, 또는 변사로 처리된 군인에 대해 우리도 관리하지 않아 자료가 없다"는 말이었다. 

황당했다. 그래서 격하게 항의했다. "남의 귀한 자식을 데려가 결국 지켜주지 못해 죽었는데, 그렇게 죽어간 군인이 얼마나 되는지 관리조차 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했다. "국방부 입장에서는 63만 명의 군인 중 고작 한명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들의 부모에게는 또 하나의 하늘이요, 유일한 땅인데, 그런 귀한 자식을 다시 부모에게 돌려 보내주지도 못해 놓고 누가, 얼마나, 왜 죽었는지 관리조차 안 했다는 게 더 놀랍다"며 다그쳤다. 

나는 "지금까지 없었다면 이번 기회에 국방부가 그 정확한 숫자를 파악해 둬야 한다, 그것이 옳다, 그렇게 해서 반드시 정해진 기일 안에 제출해 달라"고 거듭 국방부 담당자에게 요구했다. 이후 약 2주가 지나가던 어느 날, 국방부가 한 통의 자료를 보냈다. 그리고 거기에 써 있는 숫자, 

'약 3만9천 명'

1948년 군 창설 이래 2012년 12월까지 66년간 군 복무 중 사망했으나 국가로부터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한 채 사라져간 군인의 숫자를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관리하지 않아 정확한 사망자 숫자를 알 수 없다"는 국방부가 숫자 앞에 쓴 '약'자가 너무도 슬펐다. 

누구는 '대를 이어' 군 복무를 기피하고도 국무총리가 되었고, 또 누구는 가려워서 군복무 면제가 되었으나 '국무총리가 되는' 나라. 국적 이탈과 국적 변경을 통해 의무복무를 회피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난다. 이런 추세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그 헌법적 의무를 다하고자 입대하는 사람들만 바보 취급을 받는 이상한 나라. 

하지만 나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겠다. 다만, 군 복무를 회피한 당신 '대신' 국민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했다가 죽어간 이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국가가 예우해 달라. 국민이 의무를 다했다면, 이제 국가가 의무를 다해야 한다. 이 당연한 상식이 제 자리를 찾을 때까지 함께 공감해 달라. 그날까지 나는 유족과 함께 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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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을 잃은 그 부모님들이 영정을 들고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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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하기] 2016-01-27 21: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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